자유의 땅 신대륙에서 근세사의 가장 악명 높았던 노예제도가 무려 200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는 것은 분명 역사적으로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비록 현재는 공식적으로 노예제도가 법적 철폐되기는 했지만 여기서 비롯된 백인과 흑인 등의 인종 갈등은 여전히 미국사회 곳곳에 뿌리깊게 남아 있으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미국 앞날에 잠재적인 걱정을 드리우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흑인 노예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유럽에서 떠난 식민지인들이 새로운 땅에 이주하여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들 중의 하나는 거주할 건축물의 건설과 대규모 농장 일을 해야 할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도구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에 심지어 거친 땅을 일구는 작업과 건축물을 건축하는 일 등은 엄청난 일손이 필요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남부지역에서 이러한 문제가 더욱 심각했는데 왜냐하면 그곳의 주요 산물인 담배가 특히 많은 일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남부지방의 농장 주인들은 이미 일찍부터 그들을 위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에 흑인이 아닌 백인 노예들이 이러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일반적으로 노예라고 하면 보통 흑인 노예를 생각하지만 신대륙 개척 초기에는 백인 노예들이 흑인 못지않게 많았다. 대서양을 건너오는데 뱃삯을 지불하지 못한 가난뱅이들, 본국에서 추방된 범법자나 채무자들, 유럽에서 마구잡이로 납치되어 온 어린이와 집시들이 농장에서 노예로 일하는 경우가 일상 다반사였기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백인 노동력이 비교적 값싸고 충분하게 공급되고 있었고, 아직은 식민지 경제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으므로 식민지에서 건설 및 농장 노동력 부족은 당시에는 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1680년, 백인 노동자들의 공급이 갑자기 끊기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전부터 조금씩 있어 왔던 흑인 노예 수입이 본격화되었다.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이 최초로 신대륙에 건너온 것은 1619년이라고 알려져있다. 네덜란드 선적의 범선 한 척이 그해에 스무 명의 '검둥이 노예들'을 싣고 제임스타운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후로도 가끔 노예선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이 때 해도 백인 노동자가 흑인보다 흔했으므로 흑인 노예는 계속하여 상당히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17세기 말부터 갑자기 흑인 노예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와 불과 수십 년 만에 캐롤라이나 등 남부 몇 주에서는 흑인의 수가 백인 노예의 숫자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공식족인 기록으로 당시 공급되었던 흑인노예들이 처음부터 노예였는지 아니면 계약을 한 노동자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노예제도가 미국 법으로 공식 인정된 것은 1662년 버지니아법이 처음이며, 그 이전에는 하나의 사회적 관습 중 하나로 시행되고 있었고 한다. 버지니아 법에 따르면 새로 태어난 아이의 노예 여부를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정하고, 노예가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더라도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후 대부분의 식민지에서는 버지니아처럼 법으로 노예제도를 승인하거나 적어도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런 법령과 사회적 관습이 얽혀 가면서 노예제도는 신대륙 식민지에서 매우 당연한 사회적 제도로 자리 잡아갔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초기에는 남부 못지않게 북부에도 많은 노예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북부에서는 남부와 달리 노예들이 주로 집안의 허드렛 일을 맡아 했고 그들에 대한 대우도 비교적 덜 가혹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도덕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북부와 남부의 경제 구조가 현저히 달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북부에는 많은 건축, 건설, 농장 등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농장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북부나 남부를 막론하고 노예제도가 그렇게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심지어 평등과 박애를 내세웠던 퀘이커교도들조차도 집안에 몇 명의 흑인 노예를 가지고 있는 것을 부의 상징으로 자랑스러워 할 정도였다고 한다.
기독교와 노예제도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겠느냐고, 양심적인 청교도들이 어떻게 노예를 가질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구 기독교 역사만을 놓고 보자면 이 둘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서구에서 기독교의 원리를 근거로 불평등한 사회적 신분제도가 국가적으로 부정된 예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신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사람들은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노예제도를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때로는 오히려 성직자들이 앞장서서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성서 어디를 뒤져보아도 노예를 없애라는 말은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때로는 경제적 이유를 들어 노예제도를 옹호하기도 했다. 노예가 없으면 식민지 경제는 곧 파탄이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신대륙의 꿈과 희망도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노예는 주인이 돈을 주고 산 ‘재산’ 이기 때문에 어떻게 다루고 처분하든 주인의 자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아가 흑인들은 인종적으로 미개한 종족이므로 개화된 백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었다.
평등과 노예라는 전혀 모순되는 두 가지가 당연하다는 듯이 공존하는 점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미국 역사의 이런 이중성은 단지 노예제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문명 발달, 개척 등의 이름으로 희생된 원주민, 청교도적 근검정략 정신이 일구어낸 황금만능주의, 반공을 위한 국제적 독재와 제국주의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이중성은 모든 나라의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래는 흑인 노예선 관련 참고 영상이다.
https://youtu.be/oOT_ZVQtlZI?si=nlTYUtGD9XeUXB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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